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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대한민국 야구가 즐겁고 신나는 이유 50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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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Boom Up Korean Baseball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커미셔너였고, 예일대 총장을 지낸 바트 지아마티는 자신의 저서 <낙원을 위한 여가Take Time for Paradise>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사회의 여건과 가치관을 이해하는 방법은 일하는 방식을 조사하기보다 놀이와 여가시간의 활용 레저를 즐기는 방식을 연구하는 것이다.”
스포츠가 문화를 반영한다는 뻔한 말을 꺼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국 사회의 성장은 스포츠 문화의 확대와 궤를 같이했다. 그중에서도 야구는 국민스포츠다. 월드컵의 해, 또 다시 대한민국 국민은 월드컵 16강과 8강 진출이라는 ‘국가 대리전’에 열광하겠지만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는 스포츠는 여전히 야구다.
1년간 이렇게 꾸준히(무려 팀당 133게임이다!) 하다 보면 봄이 지나고 여름을 넘어 장마를 거치고, 쌀쌀한 가을바람 분 뒤 서리 내리는 늦가을까지 야구를 볼 수 있다. 올해 한국야구위원회(KBO)의 관중 목표는 무려 650만 명. 야구는 어떻게 우리나라 최고의 인기스포츠가 될 수 있었을까?
야구가 국민스포츠로 자리잡기까지 때로는 적극적으로, 때로는 뒤에서 활약했던 50가지를 꼽아봤다. 야구 붐업의 원인을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 50가지 퍼즐을 맞추다 보면 한국 야구의 밑그림은 얼추 그려질 게 틀림없다.

01 108개의 실밥
쇠가죽 또는 말가죽 2장으로 표면이 구성된 야구공은 총 108개의 솔기로 잇는다. 이 실밥은 날아가는 공과 공기 사이 마찰을 크게 해 압력차를 만든다. 또 공에 회전을 많이 만들어 속도를 늘리는 역할을 한다. 오른손 투수의 경우 두번째, 세번째 손가락을 공 바깥쪽 솔기에 빗걸어 잡은 뒤던지거나(슬라이더), 솔기를 양 손가락에 나란히 걸어 던지고(투심 패스트볼), 실밥을 가로질러 잡은 뒤(포심 패스트볼) 던지면 다종다양한 변화구가 생긴다. 프로야구는 이러한 변화구의 탄생에 타자들의 맞불을 통해 그 기량이 향상되고 발전했다. 강타자들은 “컨디션이 좋을 때는 투구의 솔기까지 보인다”고 큰소리친다. 이는 허풍으로 봐도 좋다. 홈플레이트에서
마운드까지의 거리는 18.44m다. 투수가 시속 145km 강속구를 던지면 약 0.45초 만에 타자에 도달한다. 뛰어난 투수가 던지는 공은 20회 정도 회전해 타자까지 다다른다. 솔기를 육안으로 식별하는 건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

02 야구 배트
역설적으로 방망이가 터져나와야 관중들이 많이 들어왔다. 방망이 규격도 역시 야구 규칙에 명시되어 있다. 겉면이 고른 둥근 나무로 만들어야 하며 굵기는 가장 굵은 부분의 지름이 7㎝ 이하, 길이는 106.7㎝ 이하여야 한다. 방망이는 하나의 목재로 만들어져야 한다. 무슨 이야기? 즉 두 가지 이상의 나무를 붙여서 압축 배트는 쓰지 못하는 것으로 규칙에 나와 있다.
한국 프로야구에선 1997년 한 차례 큰 소동이 있었다. 삼성 선수단이 연일 홈런을 두들기자 천보성 LG감독이 부정 배트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 삼성이 쓰던 미즈노 야구 배트 신제품은 결국 일본과 미국에까지 가서 검수하는 해프닝 끝에 ‘이상무’ 판정을 받았다. 한국 야구사에서 알루미늄 배트를 처음 도입한 이는 전 MBC 청룡 도루왕 출신 이해창 씨로 알려져 있다. 야구판에서 수완가로 소문난 그는 국제대회에 나갔다가 당시 외국
선수들이 쓰는 배트를 자신의 용품과 바꿔서 들여왔다는 후문이다.

03 부산 갈매기
롯데의 상징은 자이언츠(거인)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롯데조차 팀 로고에 갈매기를 그려놨다. 성적이 좋지 않던 수년 동안
부산 팬들은 지치지 않았고, 성적이 좋아지자 야구장으로 다시 롯데의 응원가인 ‘부산 갈매기’를 불렀다.

04 충무김밥 충무에 가지 않아도 충무김밥을 부산
사직구장에서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야구기자들이 기자실에서 가장 많이 주문하는 음식 메뉴이기도 하다. 대구구장은 볶음 우동, 광주구장은 곰탕이 인기 메뉴.

05 PEOPLE 김병현
메이저리그 입단 첫해 데뷔, 잠수함 마무리 투수 돌풍을 미국에서 일으켰다.
폭발력 면에서 박찬호보다 앞선다. 월드시리즈 우승을 두 차례나 맛봤고, 손가락 욕설 파동과 사진기자 폭행
파동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06 암표상
1990년대 초반까지 있다가 IMF 이후 한동안 프로야구에서 이 단어는 사라졌다. 1995년 540만 관객까지
치솟더니 1998년에는 263만명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지난해 600만에 육박(592만)하는 관중 증가와 KIA 타이거즈의 오랜만의 대활약에 힘입어 광주 구장, 그리고 KIA의 서울 경기에도 암표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왠지
그리운 단어.

07 올스타전
1984년부터 시작했다. 여름의 고전. 동군과 서군으로 4개 팀이 나뉘어 번외 경기를 치른다. 유독 올스타전마다 롯데 선수들이 활약했다.


08 온라인 야구게임
야구를 즐기는 또 하나의 묘미다. 보는 야구와 하는 야구의 중간. 컴퓨터 모니터로 자신이 팀을 만들어 게임을 즐길 수 있다. 프로야구 온라인게임은 이미 거대 산업화되어 있어 지난해부터는 CJ인터넷이 프로야구 전체 후원사로 계약하기도 했다.

09 김석류
야구가 인기 좋으니 여성 리포터의 팬도 많아졌다. 대표적인 예가 KBS ‘N스포츠’의 김석류 아나운서. 네티즌
100만 대군을 몰고 다닌다는 평가답게 별명은 ‘야구 여신’이다.

10 야구 만화
박수동의 번데기 야구단,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그리고 일본만화 H2. 만화로 야구 읽던 소년들은 그라운드로 나가고, 다시 집에 들어와 만화로 오늘 경기를 추억한다.

11 어린이 회원
1982년 초등학생들에게 가장 시급한 돈은 5,000원이었다. 그 돈만 있으면 프로야구 어린이 회원에 가입해 티셔츠와 글러브, 헬멧, 가방 펜던트 등을 한아름 받을 수 있었다. 프로야구 붐 조성을 위해 당시 6개 구단이 실시한 제도가 바로 어린이 회원. 어린이 회원 돌풍은 당시 종합지 사회면에 등장했을 정도였고, 이들은 자라서
프로야구를 하거나, 즐기거나, 또는 아이에게 직접 시키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12 PEOPLE 김성근 감독
김응룡의 그늘에 가려 있어 항상 2인자였다. 재미없는 야구, 벌떼야구와 동의어이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LG를 준우승시킨 후 SK로 부임, 김성근 야구 2기를 열었다. 현존하는 한국 야구 최고 지도자이자 최고 강팀이 바로 SK다. 매년 우승후보.

13 월드베이스볼클래식
이 모든 야구 열풍은 온전히 메이저리그가 거창하게 준비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라는 세계야구대회 덕분이다. 1회 대회에서 명장 김인식이 이끄는 대표팀은 박찬호, 이종범 등이 활약하며 미국과 일본 등을 꺾고 4강 위업을 달성했다. 3년 뒤인 지난해 2회 대회에서 대표팀은 준우승을 거두는 쾌거를 달성하며 WBC를 우리 대회로 맘껏 즐겼다.

14 외국인 선수
구단 전력차를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도입된 용병제는 1998년 처음 시작됐다. 용병 최초 스타는 홈런왕 타이론 우즈. 우즈는 한국에서의 활약을 발판 삼아 일본 야구로 진출했다. 두산은 공교롭게 외국인 스타를 많이 배출했는데 성실 용병의 대명사였던 투수 리오스는 일본 진출 뒤 뒤늦게 약물 복용에 걸리기도 했다. 한국 야구의 도핑 검사도 수년 전부터 꽤 엄격하고 철저하게 진행되고 있다.

15 인조잔디
재정적으로 열악한 한국 야구에서 인조잔디는 필요악이었다. 구장 관리비용이 많이 들다보니 1990년대 초반에는 잠실을 제외하고 우후죽순으로 생기기도 했다. 현재는 선수 부상의 원흉 격으로 지적된다.

16 오징어 땅콩
야구장에 숨겨서 들고 가는 소주는 야구 마니아들에게는 최고의 아이템이었다. 더불어 오징어와 땅콩은 최고의 휴대성을 자랑하는 안주거리. 지금도 이것만 있으면 40대 야구 팬들은 만사 오케이다. 야구 문화가 바뀐 지금 소주는 조금은 자제해야 할 아이템이다.

17 야구땅표
스포츠신문에 1땅, 2땅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1루수 땅볼 등을 지칭하는 약어다. 일본 스포츠지에서 처음 만든 약식 기록지를 1985년 <스포츠서울>이 가장 먼저 차용하면서 또 하나의 야구 보는 법을 만들어냈다.

18 골든 글러브
말 그대로 황금장갑. 포지션별 최고 수비 선수를 뽑는 게 원래 취지나, 한국 야구에서는 대개 타격 실력으로 뽑힌다. 기자단 투표에 의해 선발. 매년 12월 11일, 한국야구위원회 창립기념일에 행사가 치러진다.

19 연습생
장종훈 신화다. 빙그레 2군 출신 장종훈은 타고난 파워와 피나는 연습으로 1980년에서 1990년대까지 홈런왕
계보를 잇는다. 이만수와 이승엽 사이에 그가 있다.

20 전두환
그는 축구를 사랑했다. 그러나 정권이 먼저 눈독들인 것은 야구였다. 고교야구와 실업야구 리그전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때였다. 1980년 5월이 지나고 2년 뒤 프로야구가 탄생했다. 관심을 스포츠에 집중시키길 원했다. 이유야 어쨌든 그는 야구사에 남을 만하다.

21 포털사이트
좌에서 우로 눈동자가 움직이며 텍스트를 소화해가는 신문과 달리, 포털사이트는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다닐 수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각 구장에서 치러지는 야구경기를 네이버와 다음에서 실시간 중계로 볼 수 있다.


22 스포츠신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스포츠신문은 1969년 창간한 <일간스포츠>다. 이어 1985년 <스포츠서울>, 1990년 <스포츠조선>과 함께 3대 체제가 됐다. 이후 새로 창간하거나 폐간하며 현재 7개의 스포츠지가 있다.

23 홍수아
시구자로 나서 멋지게 공을 던지는 모습에 팬들은 그를 홍드로(페드로 마르티네스와 홍수아를
합친 말-페드로 마르티네스는 보스턴에서 전성기를 보낸 메이저리그의 대표 투수다)라고 명명했다. 개막식과 올스타전마다 관에서 내려온 인물이 무미건조하게 시구했던 시절과 비교하면 그로 인해 시구가 프로야구에서 확실한 이벤트로 자리 잡는 전기를 마련했다.

24 한국 야구 최고 강속구
SK 오른손 투수 엄정욱이 2003년 4월 27일 문학 한화전에서 158km를 던져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빠른 공을 던진 투수가 됐다. 엄정욱은 이듬해 6월 29일 인천 KIA전에서도 같은 구속을 찍었다. 롯데 최대성도 타이 기록을 갖고 있다. 최대성은 2007년 5월 10일 문학 SK전 7회말 등판해 158km의 강속구를 던졌다. KIA 한기주는 2007년 5월 27일 인천 SK전에서 159km를 던졌지만 KIA 스피드건에는 152km로 나와 공인받지 못했다.

25 PEOPLE 박찬호
한국 야구로서는 아이러니한 캐릭터다. 1996년 LA다저스에서의 전성기 동안 역설적으로 한국 야구는 관중 수와 인기 면에서 죽을 쒔다. 그러나 ‘건국 이후 최고의 스포츠 스타’라고 할 만큼 그의 진화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26 한국시리즈
7차전 지난해 KIA의 V10 우승은 시리즈 7차전에서 이뤄졌다. 메이저리그에서도 단 한번밖에 없다는 7차전 끝내기 홈런이 2년차 신예 나지완의 배트에서 터져나왔다.

27 신바람 야구
MBC청룡이 1990년 LG로 인수된 첫해 그들은 우승을 거둔다. 이어 1994년 이광환 감독과 신인 3총사 김재현, 서용빈, 유지현이 합작해 다시
한국시리즈를 거머쥐었다. 한 팀의 특징을 제대로 설명한 단어는 아직까진 이게 유일하다. 1990년대 초반 LG는 정말 신바람이었다.

28 돔구장
프로야구의 미래다. 미국 일본이 갖춘 돔구장, 우리에겐 아직 없다. 8개 팀밖에 없는 인프라가 아쉽다. 1990년대 중반 이미 8개에서 10개 팀 정도로 구단 수가 늘어났다면 미래는 또 달라졌을 것이다.  

29 하일성 & 허구연
그라운드 스타 말고도 마이크 스타를 탄생시켰다. 하일성 해설위원과 허구연 해설위원. 구수한 입담의 하일성이라면, 알기 쉬운 분석의 허구연으로 두 해설자들은 프로야구와 함께 했다. 하위원은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을 거쳐 방송 복귀를 준비 중이고, 허위원은 올해도 MBC를 통해 안방을 찾아간다.


30 한국 최초의 야구장
한국 최초의 야구장은 1925년에 만들어진 경성운동장 내 야구장이다. 당시 동양 최고라고 할 정도로 국제적인 규모였다. 좌석 수용규모는 2만7천 명. 경성운동장 야구장은 1959년 동대문야구장으로 명칭이 바뀌어 한국 야구의 메카로 자리매김했다. 2007년 11월 철거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현재 그 자리에는 역사문화공원과 디자인센터가 들어섰다.

31 한국 최장거리 홈런
우리나라 최장거리 홈런의 주인공은 4명으로 공식 비거리 150m다. MBC 청룡의 선수 겸 감독이었던 백인천을 시작으로 양준혁, 김동주, 이대호가 뒤를 잇는다.

32 최고 아름다운 치어리더?
답은 없다. 관중들 눈엔 치어리더는 모두 예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어리더 스토커나 마니아들은 꽤 있다. LG 트윈스의 치어리더 ‘예진 아씨’ 강예진 씨 역시 구름 팬들을 몰고다니는 인기 치어리더 중 하나.

33 선린상고
태초에 고교야구가 있었으니. 프로야구 태동 전 선린상고와 경북고로 대표되던 고교야구는 수많은 야구 하이틴 스타를 탄생시켰다. 그중 선린상고 박노준은 1981년 봉황대기 결승전에서 발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며 많은 야구 소녀들의 가슴을 울렸다. TV채널 3개에 저녁 고교야구 생방송이 진행되던 시절이었다. 지금 프로야구 선수들도 누리지 못하는, 어쩌면 호사에 가깝다.

34 히어로즈 턱돌이
선수단보다 더 인기있는 마스코트. 광주구장에서 아르바이트하던 길윤호 씨가 턱이 나온 히어로즈 가면을 쓰고 재롱을 부려 인기를 끌면서 마스코트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턱돌이의 인기는 타 구단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기아와 삼성의 호랑이와 사자 마스코트는 과거에 비해 사랑스럽고 귀여운 이미지로 변모했다. 롯데는 누리, 아라, 피니라는 깜찍한 캐릭터를 내세워 팬들을 공략하고 있다. 이번 시즌에는 두산의 마스코트가 로봇 곰으로 바뀌었다. 이름은 철웅이. 올해는 마스코트들의 재롱 경쟁도 눈여겨볼 만할 것이다.

35 김응룡
한국시리즈 V9의 감독. 김응룡의 리더십은 1980~90년대 가부장적 질서를 그대로 빼닮았다. 엄한 어른의 군림은 역설적으로 개성 강한 해태 선수들을 장악할 수 있는 키워드였다. 해태에서 9번 우승을 한 뒤 삼성으로 옮겨 개인 10번째 우승을 맛봤다

36 PEOPLE 이종남
한국 야구의 대표적인 야구전문기자. 초짜 기자 시절부터 야구 외국서적을 들고 다니면서 번역에 힘썼고, <스포츠서울>에 연재했던 이종남의 야구산책은 야구로 글쓰기, 스포츠 기사의 전형을 마련했다는 평가다. 2006년 6월 지병으로 숨졌다.

37 장훈
한국 프로야구 태동에 앞서 일본에서 활약하던 장훈의 모습은 스포츠 영웅의 표상이기도 했다. 차별
받는 재일 한국인, 질시와 차별을 딛고 3,000안타를 때려내며 일본 야구의 거대한 아이콘 중 하나로 떠올랐다.

38 풍선방망이
우리나라 중소업체에서 개발해 2000년대 초반부터 한국 야구장에서 쓰이던 막대풍선은 메이저리그 애너하임 에인절스에서 사용되면서 지금은 세계인의 대표적인 응원도구로 자리잡았다.

39 야구공
야구공은 닳기도 쉽고, 잃어버리기도 쉬운 소모품이다. 프로야구는 경기마다 100개 이상 쓴다. 공인구 가격이 7천원에 이르는 것을 감안하면 프로구단에도 부담스러운 액수다. 야구공의 규격이 정해진 건 1872년이다. ‘한 주먹 정도의 크기에 빨간색 실로 매듭한 공’이 당시 야구공의 정의였다. 흰색 공이 대부분이었지만 노란색 공도 가끔 쓰였다. 1930년대 미국에서 야간 경기가 시작되면서 흰색으로 통일됐다. 밤에도 공을 잘 볼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다. 어린 시절 ‘홍키공’이라고 불렸던 혼큐(本球, 본경기에서 쓴다는 뜻의 일본 용어)는 정말 비쌌다.

40 프로야구선수협
1988년 최동원, 김시진 등이 주동이 돼 만들려던 선수 노조는 구단의 방해로 무산됐고, 그 둘은 상대 팀으로 맞트레이드된다. 세월이 흘러 1999년 회장 송진우를 주축으로 한 선수협이 재결성됐고, 이때 고 박용오 총재의 유명한 단어가 탄생했다. “야구 안해!” 그러나 야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현재 회장은 롯데 손민한.

41 선동열 & 최동원
이 필생의 라이벌 구도를 다시 만들 수 있을까? 호남- 광주일고-고려대-해태의 선동열과 영남-경남고-연세대-롯데의 최동원. 슬라이더의 선동열과 커브의 최동원이었다. 모나지 않은 성격이나 때로는 낯가리는 선동열은 한국시리즈 부진 징크스가 있었다. 카리스마 있고, 직선적이며 가끔은 독선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최동원은 한국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1984년 한국시리즈 4승으로 팀을 우승 반열에 올려놓았다. 최동원은 군 문제로 외국 진출에 실패했지만, 선동열은 1996년 일본야구 주니치에 입단하며 제2의 전성기를 연 뒤 2000년 화려하게 은퇴했다.


42 PEOPLE 김대중
어둡고 컴컴했던 시절 잠실구장에서 해태가 이기면 호남 팬들은 ‘목포는 항구다’와 ‘동백아가씨’와 함께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연신 외쳐댔다. 민주 정부가 들어선 뒤 해태 응원가는 사라지고, 더 이상 사람들은 대통령 이름을 외쳐대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야구와는 그다지 큰 인연은 없었다.

43 한국 야구 최장 경기
2009년 5월 21일 광주에서 열린 KIA와 LG의 경기는 5시간 58분이 소요돼 역대 최장 경기로 기록됐다. 각각
8명씩 총 16명의 투수가 마운드에 올랐다. 두 팀 합계 투구수는 무려 532개였다.

44 MBC ESPN
1990년대 후반까지가 스포츠지의 전성기였다면, 2000년대 이후부터 케이블 스포츠채널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그중에서도 MBC ESPN은 다양한 야구 그래픽과 자막, 때로는 과감할 정도로 매서운 이순철 해설위원 등이 등장하며 야구 채널 중 수년간 톱을 차지했다.

45 이만수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 헐크라는 별명답게 야구장에서 마스크를 벗고 괴성을 질러대 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최근 SK팀 코치로 활약하며 팬티만 입고 그라운드를 뛰어 이슈가 되었다.

46 이승엽
2003년 그가 때린 56호 홈런볼은 시즌 아시아 홈런 신기록이다. 경산볼파크 역사관에 전시돼 있다. 이승엽의 2003년 55호 홈런볼은 1억2천500만원이며 개인 통산 300호 홈런볼은 1억2천만 원에 각각 낙찰됐다. IMF로 침체됐던 한국 프로야구에 다시 관중이 몰려든 것도 이승엽(현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이 홈런을 펑펑 때려내면서다.

47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9전 전승 금메달. 일본과 미국, 쿠바 등 내로라하는 강팀을 모두 격파하고 김경문 대표팀 감독과 선수단은 한국 스포츠 사상 구기 종목에서 처음으로 금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일궜다. 2008년 야구 흥행의 한 축이 됐다.

48 한·일 슈퍼게임
1990년에 시작한 한·일 슈퍼게임은 우리의 뒤떨어진 야구 수준을 확인하는 자리에 불과했다. 1998년 이후 한-일 슈퍼게임은 중단됐고, 오늘날 한국과 일본 리그의 우승팀, 여기에 타이완과 중국 등 4개국이 참가하는 코나미컵 야구대회로 진화했다.

49 이종범
1980년대가 선동열-최동원의 시대였다면 1990년대는 바람의 아들 이종범이 대세였다. 공-수-주 어느 하나에서도 모자람이 없었던 그는 해태의 최전성기를 이끌었고 이후 일본에서 활약한 뒤 해태의 후신 KIA로 복귀했다.

50 당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다. 당신 덕분에 프로야구는 이렇게 자랐고 성장했으며, 뻗어나갈 수 있었다. 야구라면 자다가도 벌떡 깨어나 정신 차리는 여러분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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