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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

10년째 써온 내 낡은 다이어리에 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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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다이어리를 서오면서 이런 저런 노하우를 알게 됐다.
내게 다이어리는 단순한 필기도구가 아니다.
시간의 흔적과 인생의 지혜를 담은 그릏이다.
이젠 습관처럼 굳어진 다이어리 쓰기에 관한 이야기.


너무 무난해서 고루하기까지 한 이 검은색 가죽 다이어리와 인연을 맺게 된 건 순전히 가격 때문이었다.
무엇 때문에 이리 쌀까 싶어 다이어리 내지를 살펴보니 지나버린 연도가 선명히 찍혀 있었다.
이런 상품일수록 할인율은 파격적이게 마련. 지금 생각하면 그게 10만원잉 채 안되는 가격으로 몽블랑 가죽 다이어리를 구매하게 된 계기였다.

한 번쯤 잃어봄직하기도, 어디가 고장남직도 한데 어찌 된 일인지 10년째 이 다이어리와 나는 분신처럼 붙어 다니고 있다. 지금도 매월 새로운 한 달의 업무 일정표가 이 다이어리에 쓰이고 진행 일정이 체크되며 자질구헤한 낙서와 인터뷰 내용이 담긴다.

앙증맞은 핸드백메기를 염원하면서도 이 무겁고 큰 다이어리를 넣을 공간이 없으면 가차없이 발길을 돌리는 것으로 나는 다이어리와의 신의를 지킨다.

다이어리의 스프링은 고장 한 번 없이 속지를 갈아끼우는 일에 헌신했다.

속지는 이제 신발 상자 하나를 다 채울 만큼 엄청난 양으로 불어나 종류별로 구분되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지금 유효한 기록들은 이런 것이다.

셀레브리티들의 연락처와 주소 인터넷에서 쉽게 찾기 어려운 소품 대여 업체, 휴대폰을 잃어벼렸을때 사용했던 지인들의 전화번호등. 비뚤비뚤한 글씨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글씨.

색깔로 나는 그 글이 적혔던 시기와 당신 내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매년 위시 리스트칸을 만들어놓고 물욕을 자극하는 세상의 모든 물건들의 이름을 그곳에 적어놓았던 탁에 까사렐의 고전적인 정장과 코트에서부터 한길사에서 출간한 27만 3000원짜리 리영의 저작물 열두 권의 흔적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기사에 써먹으면 좋을 것 같아 베껴놓은 소설 글귀. 홍대 앞의 맛난 레스토랑 리스트.

어느날인가의 비참했던 실연 기록. 맞춤 양복점에 들른날 언젠가 선물해야지 싶어 적어놓은 아버지의 목둘레사이즈와 팔 길이까지....

그러고 보니 이 수첩에는 내 지나간 인생의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아날로그적 글쓰기를 추억으로 몰고 간다.
혹은 먹있다고 상찬의 말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에게 다이어리는 생활이고 밥벌이의 원천이며 습관이자 삶이다.
이게 있어서 그리 도드라져 보일 것도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게 없으면 나는 내 삶의 방향타를 잃어버린 것처럼 헤맬것이 분명하다.

먹고사는 일이 '무엇인가 적는 일'과 관련되었다면 나는 단연코 다이어리 하나쯤 똑똑한 것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거기에 담을 내용 역시 삶을 증거할 수 있는 기록들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해가 바뀔 때마다 나는 의식처럼 교보문고 문구 코너를 찾아 양지사 속지 1년치를 구매한다.
이 시기를 놓치면 만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차고 넘치도록 산다.
700원짜리 사치가 어디 사치인가? 돌아와 다 해진 수첩의 스프링을 열어 이제 임무를 다한 속지를 걷어내고 깨끗한 새 속지를 끼워 넣는다.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휴식같은 의식이다.

[진성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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