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에드바르 뭉크. 예술의 전당 함가람 미술관. 9월 19일까지. 절규

진성다이어리 2024. 7. 30.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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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에드바르 뭉크 

절규 9월 19일까지


 

 

 

 

 

절규로 유명한 뭉크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 지금 원본 그림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주차는 오페라쪽으로 하시면 가까워요. 

 

 

우리는 현장에서 주말에 바로 티켓을 구매했고요. 

주말이라서 그런지 또 날이 더워서 그런지 굉장히 관람객분들이 많았네요. 

에드바르 뭉크 비욘드 더 스크림 

 

미술에 문외한이지만 이 그림은 너무나 유명하기에 관람을 자연스럽게 기대했지요. 

모두 마눌이 끌고가지만 말입니다. 

 

 

 

 

 

입장료는 성인 2만원 

 

 

 

노르웨이의 화가이자 판화가입니다. 1863-1944

표현주의의 선구자이자 유렵 현대 미술의 대표 주자 

이번 전시를 통해 모더니즘에 없어서는 안 될 파격적인 공헌을 한 작품을 조명합니다. 아시아에서 가장 방대한 규모의 회고전인 이번 전시에서는 '절규'와 같은 그의 상징적 모티프의 출현과 소멸, 그리고 제료를 기반으로 한 모더니티에 대한 그의 공헌을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여전히 뭉크의 예술성을 상징하는 작품은 그것이지만, 이번에는 정통을 벗어난 그의 회화적 표현주의와 재료에 대한 급진적 실험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작품 세계를 더 깊게 파고듭니다. 개념적 차원에서 작품을 담아내는 바탕체인 화판을 파격적으로 다루며 작품 제작 실패의 가능성을 안고 작업하면서 판화, 사진, 콜라주, 회화 등 예술 매체 간의 전통적인 경계를 넘나들었습니다. 

개인 소장품 및 오슬로 뭉크미술관의 희귀 걸작을 포함하여 뛰어난 회화 드로잉, 판화 등의 작품을 주밀하게 담아내었습니다.

불안, 뱀파이어, 병든아이, 마돈나, 두 사람 외로운 이들과 같은 중심적은 주제들과 풍경화, 누드화, 초상화 등을 다룹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작품의 형태, 재료 및 색상에 있어 관행적 예술 규범을 모두 무시해 왔으며, 그의 개인적 경험은 모더니티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재료와 기법에 대해 대담하면서도 관행을 벗어난 접근을 취했습니다. 젊은 시절 크리스티아니아와 주변 지역의 소박한 풍경을 그리고 주변 환경과 사람들을 기록했습니다. 전통적 노르웨이 풍경화에 영감을 받은 그는 생동감 넘치고 정밀한 표현을 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카메라 옵스큐라와 카메라 루시다를 사용하여 작업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1880년 화가로 데뷔한 그가 처음으로 그렸던 소형 유화들은 노르웨이 자연주의 화가인 프리츠 타우로프와 크리스티안 크로그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관심은 인간을 향했죠. 아스타칼슨과 같은 작품에서 그는 물감의 투명성을 파격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자신의 스타일을 자연주의와 분명하게 구분지었습니다. 

 

 

 

 

 

관람객들이 이토록 많아서 천천히 작품을 더 세밀하게 봐야하는 그런 것 

 

 

 

 

 

 

 

 

 

 

 

1889년부터 1892년까지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센 강, 그리고 니스의 화려한 지중해 풍경을 다루며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회화 기법을 명시적으로 탐구했으며, 자연주의에 영원한 작별을 고합니다. 1893년 '생클루의 밤'에서 실의, 슬픔, 우울한 불만 사이 우울감의 표현을 강조했습니다. 비록 절망에 빠져 창가에 앉아있는 인물로 덴마크 시인 에마누엘 골드스타인을 그렸지만 이 그림을 통해 아버지의 죽음 이후의 자신의 심경을 드러낸 것처럼 보입니다. 창틀은 공허한 방 바닥에 이중 십자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모자를 쓴 남자는 밤 속으로 녹아든 듯 합니다. 

1890년대에는 '뱀파이어 인어'를 포함한 첫 상징주의 작품들이 탄생합니다. 이 방식을 휘몰아치며 역동적입니다. 독특한 빛의 효과는 신비로우면서도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풍깁니다. 

 

 

 

 

 

 

 

불타오르는 사랑의 절정을 상징하는 '키스'는 '생의 프리즈' 시리즈에서 가장 상징적인 모티프입니다. 이 작품은 남녀의 시각적 융합을 완전한 방황의 순간으로 묘사합니다. 그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함께함은 일시적이며, 개인성을 잃는 대가로서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별, 질투, 우울, 깊은 절망,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죽음이라는 주제가 항상 그 뒤를 따릅니다. 

1880년대부터 사망 직전까지 '키스'라는 주제에 전념했으며 수많은 스케치, 드로잉, 열점의 판화, 열두 점 이상의 회화 작품에서 이를 다양하게 다루었습니다. 

 

 

 

 

 

 

 

 

 

 

 

 

 

1892년부터 1895년까지 베를린에서의 시기를 지나 1896년부터 1897년까지 파리에 체류하며 석판화와 목판화 작업제 집중했습니다. 이후 수년간 그의 화풍은 점진적으로 변화했습니다. 이 기간은 회화와 사진에 대한 실험에 몰두했던 시기로, 그의 작품에 독특한 스타일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그의 작품은 더 표현적으로 변모했고, 색채의 적용은 더 직접적이었으며, 색조는 강렬해졌습니다. 

 

 

 

 

 

 

 

 

 

 

 

 

 

 

 

 

 

 

 

이제 그 유명한 작품이 있는 룸 

 

 

 

 

 

 

 

 

 

 

절규 

 

이 전시의 시그니처 백미입니다.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행위들이 자행되었던 제1차,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절규'는 20세기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으로 자리잡았으며, 가장 많이 복제된 그림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1892년 그가 쓴 일기에는 이 장면에 대하여 메모가 남겨져 있습니다. "해질 무렵 두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고 무언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피로감을 느껴 울타리에 기대었다. 홍수와도 같은 불길이 검푸른 피오르 위로 뻗어 있었다. 친구들은 걸어가고 있었지만 나는 뒤쳐져셔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때 나는 자연의 거대하고 무한한 비명을 들었다." 요동치는 풍경, 그림을 대각선으로 가르는 다리 난간 극도로 과장되게 기울어진 풍경을 통해 문명인으로서의 두려움, 패닉, 그리고 극한의 공포를 묘사합니다. 또한 주인공의 고립은 그의 정서적 상태와 필연적 강박을 더욱 잘 보여 줍니다. 이 전시작품은 채색 판화본으로 그가 직접 채색한 것으로 작품에 독특한 인상을 부여합니다. 

 

 

 

 

 

 

 

 

 

 

 

사람들이 관람하는 것을 보면 작품의 크기를 짐작 할 수 있지요. 

 

 

 

'생의 프리즈'는 수많은 작품 중에서 핵심을 이룹니다. 이 시리즈는 삶의 순환과 관련하여 생식, 수정, 배아, 생명의 나무, 유년기, 청년기, 매혹, 키스, 이별, 절망, 절규, 그리고 죽음과 같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문제들은 탐구하면서 사랑, 고통, 우울, 죽음에 대해 상징적이고 강렬한 표현을 발전시켰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질병, 죽음 그리고 애도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여동생 잉에르의 출생 이후 결핵으 앓다 30세의 나이로 사망, 13세가 되던 해 그 역시 결핵에 걸렸으나 살아남았고, 이후 자신의 누이 소피에가 극심한 고통을 겪다 사망하는 것을 목도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트라우마적 사건들을 겪으며, 그 기억으로 '병든 아이', '임종의 자리에서', 또는 '병실에서의 죽음'과 같은 작품들이 탄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풍경은 인간의 감정과 마음 상태를 투영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자연 모티프와 풍경을 종종 인간과 관련시켜 그들의 감정을 강조하는가 하면, 종종 풍경만을 묘사하기도 하였습니다. 

 

1909년 신경쇠약에서 회복하고 코펜하겐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노르웨이로 귀국한 그는 작은 연안 도시 크라게뢰의 스크루벤이라는 넓은 목조 주택을 임대하여 첫 번째 대형 야외 스튜디오를 설치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스튜디오, 정원, 숲, 또는 암초와 같은 주변 환경으로부터 주제를 찾았습니다. 

 

 

 

 

 

 

누드는 1902년 베를린으로 돌아온 후에야 그의 작품 중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게 됩니다. 

비물질화된 형태를 1930년에는 석판화로, 1932년에는 청동으로 주조한 조각으로 옮겼습니다. 

자신의 에켈리 자택에 철저히 고립되었고, 이성은 그의 삶에서 점점 더 작은 부분이 되어 갔습니다. 그는 모델을 고용하여 여성 누드에 대한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모델과의 관계는 항상 상호 신뢰와 밀접한 개인적 유대로 특징 지어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특성' 이었으며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890년대 중반 치명적인 여성과 연약한 여성을 하나의 그림에 결합하여 19세기 미술의 전형적인 여성상을 종합한 '마돈나'라는 주제를 실험적으로 다루었습니다. 

 

 

 

 

 

 

 

만남 

 

인간과 인간 사이의 에로틱한 만남과 애정은 항상 실패와 그에 따른 이별과 이별을 수반합니다. 작가가 묘사하는 남녀 관계에서는 여성이 주도권을 쥐고 있습니다. 

 

 

 

 

 

 

 

 

 

 

 

초상화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초기에는 노르웨이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을, 이후 베를린 보헤미안들의 단체 초상화, 후원자와 수집가들의 의뢰로 그렸습니다. 

 

 

 

 

 

 

급진적 혁신가 

 

 

 

 

 

 

 

 

 

 

 

 

 

 

목판화와 실험

판화 작품은 동판화, 석판화, 목판화 등 750여개의 주제와 최대 삼만여장의 판화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판화를 제작한 후 수년 뒤 이전 판 위에 변형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기 때문에 주요 판화작품의 경우 정확한 연대기를 파악하는 것이 복잡합니다. 

 

 

 

 

 

 

 

 

 

 

 

 

 

 

 

 

말년 자화상

노년의 그는 스스로 고립된 상태에서 고독과 노화라는 주제에 점점 더 집중합니다. 1930년 오른쪽 눈의 혈관 파열로 일시적으로 실명에 가까워진 것이 클로즈업 자화상 연작을 제작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투명성과 해체에 대한 그의 집착은 생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죽음을 상징하는 일종의 강박관념으로 더욱 강렬해집니다. 1940-1943년작 '자화상'에서 그림자는 죽음의 순간을 예견하는 하나의 자율적인 인물이 되고, 신체의 투명성은 소멸을 예고합니다. 

1944년 1월 23일 에켈리의 자택에서 사망합니다. 

 

 

 

 

 

가장 마지막 룸 

 

조명이 근사하죠~ 

 

 

 

 

 

 

이번 생의 프리즈 퍼즐 전시는 뭉크의 직소퍼즐 방식의 판화기법에 착안하여 최신 기법으로 제작된 직소퍼즐로 구성하였습니다. 

 

 

 

 

 

 

 

 

 

 

 

 

 

이제 많은 작품을 관람하고 나왔네요. 

나오면 한바퀴 돌았음을 알 수 있었고, 또 굿즈를 판매하는 곳이 당연히 나옵니다. ^^ 

 

그 어느 미술관람보다 뜻 깊게 잘 관람했어요. 

 

*본문안의 내용 설명은 전시에 붙은 것을 따라 쓴 것입니다. ^^ 

 

대 추천입니다. 왜냐하면 대 만족이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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