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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용산역사박물관 개관. 철도 그리고 철도병원. 서울 용산 데이트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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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그리고 

용산역사박물관 개관

철도병원 이야기 


 

또하나의 역사 박물관이 얼마전 개관

3월 23일 이었습니다. 

얼마전 다녀왔습죠. 

 

국가등록문화재인 용산철도병원 본관(1928년)을 리노베이션하여 재탄생. 

병원이 간직하고 있는 옛이야기와 근대건축문화유산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존중하여 외벽 벽돌, 창호, 외촤처치실, 복도아치, 계단실, 현관 스테인드글라스 등 병원의 옛 모습을 고증하고 원형 복원 및 보존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격변의 세월을 거쳐 지금의 용산이 되기까지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그려보는 역사 문화 랜드마크로서 용산의 진정한 명소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4월 3일까지는 카페테리아에서 음료를 무료제공해 주셨지요. 감사해요 ^^ 

지금은 무료기간은 끝났습니다. 

 

 

실내로 들어서면 고풍스런 디자인의 건물을 만날 수 있는데, 일본식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요. 

 

 

1층은 한양의 길목, 조선을 움직인 거상, 경강상인.

군사기지로 새로운 지형을 그리게 된 곳. 

냉전 속에서도 뜨겁게민 했던 곳. 

인터섹션 체험존 

철도 교통의 중심

철도 의료의 본거지로 섹션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역시 요즘 시대에는 미디어시대입니다. 

어느 곳을 가도 화면이 잘 설치되어 있고요. 

 

 

한양의 길목

조선시대 용산은 도성 서쪽의 무악산, 오늘날의 안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와 한강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아우렀습니다. 그 구불구불한 능선이 한강에 이르러 봉우리를 형성하는데 전체적인 형세가 용을 연상시킨다 하여 용산이라고 이름 붙었죠. 건국 초기 이곳은 명확히 한양 땅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한양의 경계는 도성이었고요. 다만 수도 한양을 관할했던 관청 한성부는 도성과 함께 도성으로부터 10리 (약 4km) 에 이르는 성저십리까지 관할했습니다. 이 성저십리에 해당했고요. 도성 밖 한적한 강변 마을이었던 이곳에 물길 따라 포구가 발달하면서 삼남을 오가는 대로가 갈라졌고, 각 지역의 세곡이 집결되어 도성 안으로 운반되었습니다. 자연히 많은 물자와 사람이 용산으로 모여들었죠. 길목이라는 입지는 이곳을 교통과 물류의 거점으로 거듭나게 한 바탕이었습니다. 

 

경강상인

18세기 수상 교통이 발달하면서 뱃길의 중심이었던 경강을 기점으로 전국 단위의 유통체계가 잡혔습니다. 경강에서도 서강, 마포, 용산 일대의 상권이 크게 성장했는데 그중 이곳은 세곡 운송에 특화된 지역이었습니다. 토착민들은 세곡을 수송하는 일에 종사하여 큰 이윤을 남겼고, 이를 바탕으로 각종 상업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들은 경강상인이라 불리며 조선의 시장 경제를 쥐락펴락했습니다. 금난전권이라는 특권을 부여받았던 시전상인과 경쟁할 만큼 강력한 자본력으로 18세기 후반 전국에 이르러 상품유통을 장악했지요. 

 

 

예전 용산역을 재현한 곳도 재밌습니다. 

열차시각표까지 써놓아져 있지요. 

 

용산에서 런던까지! 

이런 열차가 어서 빨리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통일호라고 하는 열차안에서 말이죠. 

 

 

 


 

 

가장 안쪽은 옛 철도병원.

타일을 보면 예전 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근대 도시는 교통 발달, 인구 증가와 더불어 급속도로 팽창하면서 새로운 도시문제를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전차, 기차, 자동차와 같은 근대 교통수단은 사람들을 빠르게 이동시킨 반면 위험천만한 교통사고를 초래했죠. 또한 지역 간 교류의 매개체로서 교통수단은 전염병을 다른 지역으로 더욱 빠르게 전파시킬 위험이 있었습니다. 

철도병원은 철도 종사원의 보건 의료를 위해 운영되는 병원이면서 지역 거점 병원이었습니다. 철도종사원과 가족 외에도 산업재해, 화재, 교통사고 등의 일반 환자들도 이곳에서 치료받았습니다. 또한 전염병 예방접종을 실시하고 전염병환자를 수용하기도 했습니다. 

본관은 철도의료시설과 1920년대 후반 병원 건축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기차역과 전차정거장, 찻길에 인접했고, 외과로 진입하는 부출입구가 있어 외상환자가 빠르게 치료받을 수 있었습니다. 건축적양식은 고전주의와 모더니즘 양식이 절충된 독특한 건축물입니다. 

 

 

 

 

 


 

제과산업의 격전지이기도 합니다. 

1930년대 우리나라 제과산업의 중심지. 당시 제과 회사는 대부분 일본인이 운영했는데 해방 후 한국인들이 인수했습니다. 1945년 박병규, 민후식, 신덕발, 한달성 등 4인이 나카오카 제과를 인수해 해태제과를 창립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1934년 창립된 풍국제과는 1956년 이양구가 인수해 동양제과(현 오리온)로 전환했습니다. 한국인이 창립한 영일당제과( (현 크라운제과)와 롯데제과도 전례를 따라 이곳에 정착. 이후 해태제과가 크라운제과에 흡수되어 용산에서 크라운해태제과, 오리온, 롯데 3대 제과회사가 경쟁하는 구도가 형성. 

롯데는 영등포로 이전하였으나 크라운해태와 오리온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창도 멋졌고요. 

 

2층은 다양성이 조화를 이루는 터전

경계를 풀고 공존의 시대로 나아가는 곳

다목적실

기획전시실

교육실

기증자 명예전당 등이 있습니다. 

 

이방의 문화를 기꺼이 끌어안은 이태원

일제강점기 이곳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주로 원효로에서 남영동, 후암동으로 이어지는 지역에 거주했습니다. 해방 후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자국으로 돌아갔지만 국내에 남은 일본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주지를 도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한강변의 동부이촌동으로 옮겼습니다. 미군 주둔과 함께 인근 이태원에는 기지촌이 형성되었죠. 미군기지에서 흘러나온 혹은 버려진 물품들이 기지촌을 통해 팔려나갔습니다. 전후 부족했던 물자뿐만 아니라 영화, 음악, 미술 등 미국의 대중문화가 용산에서 한국사회 전반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오랫동안 이방의 문화를 흡수하고 전파해 온 이곳은 문화적 포용력이 높은 지역적 특색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문화 지형을 바탕으로 오늘날 다양한 외국인 공동체가 일대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1976년에는 이태원에 서울중앙성원이 개원하여 이슬람교도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주도 증가했습니다. 외국인만 밀집된 건 아니었죠. 경제적 여유가 없거나 지방에서 상경한 내국인들이 생업을 찾아 이태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지촌에 모여들었습니다. 

 

어린이 들이 책을 볼 수 있는 공간도 있고요. 

물론 어른들도 그렇습니다. 

이용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인테리어가 넘나 유아틱 ^^ 

 

 

스티커 출력하기 - 무료

 

 

2층에서 밖을 나오는 공간도 있고요. 

이곳에서 시원하게 앉아서 잠시 휴식해도 좋겠어요. 

외관 모습을 보는 것도 즐겁습니다. 

 


 

 

3층 옥상 루프탑공간을 추천드려요. 

지금 보이는 곳은 바로 계단위로 올라와서의 모습이고요. 

 

조명을 켜 놓아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요. 

 

 

바로 옆에는 철도고등학교가 있습니다. 

 

 

아직 푸릇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용산역도 저 멀리에 보이고요. 

꽤 긴 공간이라서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습니다. 

 

 

앞에는 누구나 사랑하는 BTS의 사무실 건물. 

 

 

뒤쪽으로 보는 이곳 박물관 건물

벽돌의 색이 참 이쁘죠! 

 

 

1층에 내려오니 카페테리아에서 맛나게 커피를 무료로 주셨습니다. 

원두는 스타벅스원두. 

 

 

우리는 이곳 길가안쪽에 주차를 한대 했었는데, 공사하는곳 바로 옆이었고요. 

이곳 단점이 주차장은 없다는게 에러! 

 

조금 더 공부할게요. 

 

군사기지

1904년 러시아와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전쟁에 앞서 대한제국은 중립을 선언했지만 일본은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고자 대한제국을 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체결했습니다. 의정서에 따르면 일본은 군 잔략상 대한제국의 영토를 임의 수용할 수 있었죠. 이에 일본은 일대의 부지를 군용지로 제공할 것을 요구했고, 일대에 군사기지를 건설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 주민들이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한 채 기지 밖 동쪽으로 강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기지 서쪽 용산역을 중심으로 신시가지가 개발되어 일본인 거류지가 형서되었고요. 

 

냉전 속에서도 뜨겁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았으나 곧 미국과 소련의 의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분할 점령됐습니다. 남한의 경우 미 육군 제24군단 예하7사단이 용산기지에 사령부를 설치했죠. 약 3년만에 미군정이 종료되면서 미군은 순차적으로 한국에서 철수했습니다. 그러나 곧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미군의 상시주둔이 결정되었습니다. 전쟁에 참전했던 제8군은 서울이 수복되자 용산기지 재건을 추진했습니다. 재건은 당시 한국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죠. 이태원 일대에 기지촌이 형성됐고, 기지에서 반출된 물품들이 남대문 도깨비시장을 통해 유통되면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또한 해방 이후 이북에서 월남하였거나 전쟁으로 터전을 잃은 사람들, 해외에서 귀국한 동포들이 용산기지 인근 남산 자락에 마을을 형성했습니다. 해방 후 미군정청이 접수한 지역이었지만 통제가 심하지 않아 가능했던 일입니다. 

 


 

평일 10시부터 6시까지 운영합니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고요. 1월1일. 설날 추석당일은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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