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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인천 한국 이민사 박물관. 첫 하와이 이민 역사. 1902년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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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한국 이민사 박물관

첫 하와이 이민 역사

1902년 출발


 

 

얼마전 주말 인천으로 향했습니다. 월미도에 있는 이민사박물관을 관람하려고요. 

하와이를 워낙 좋아하다보니깐 이제 이민의 역사까지 궁금해 지더라구요. 

 

주차는 무료였고요. 

주말인데도 그리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야외에는 예전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했던 기계등을 전시해 주고 있는듯 했습니다. 

 

 

들어가기전에 이런 기계를 보니깐 신기하기도 하고요. 

친절하게도 한쪽에서는 모니터로 이 기계를 이용해서 일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더라구요. 

 

 

본건물 입구입니다. 

건물이 두개 있는데 이 건물이 큰 본건물이고요. 

주차장쪽인 우측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듯 합니다. 

 

 

들어가기전에 입구 앞에 정원에도 안내가 있어서 구경을 하고 들어가려 합니다. 

 

 

한국최초, 인천최고 100선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이민 출발지인 이곳은 한인 디아스포라의 상징과 같은 곳이라 합니다. 

1902년 12월 22일 121명이 제물포항을 출발한 것을 시작으로 1905년까지 64회 약 7,400여명이 하와이로 떠났습니다. 

인천시는 740만 재외동포의 역사를 기억하고자 미주이민 100주년을 기념하여 월미도에 이곳을 건립하였습니다. 

 

 

기념비문도 보이고요. 

 

 

입구로 들어가면 안내를 해주는데 크게 세계전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서 2층부터 관람하면 됩니다. 

 

 

연도별로 이민출발한 표시를 해주고 있지요. 

2층은 모두 하와이의 관으로 알려주는 만큼 역사적으로 첫 출발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겠죠. 

 

 

 

사람이 저희만 있는 것 같아서 더욱 좋네요. 

나중에 한팀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말이에요. 

처음들어서서 보인 곳은 이민사연표입니다. 

 

 

그리고 그때 당시의 우리나라정세와 하와이의 정세. 이민의 주선을 했던 알렌과 데쉴러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의 사이. 대한제국시절 우리나라는 굶주렸고, 또 힘든 시기였죠. 

 

 

계속되는 가뭄으로 인해 혹독한 굶주림. 서구 열강의 조선 진출에 따른 이권 개입 경쟁에 의해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치적 사건들이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이렇게 떠나는 것은 빈곤이라는 경제적 요인뿐만 아니라 불안정한 정세를 벗어나려던 요인도 있었던 것입니다. 

 

 

사탕수수 농장이 본격적으로 조성된 때는 19세기 중엽부터였습니다. 설탕 수요는 비약적으로 증가하였지만 미국 남부에서의 공급이 어렵게 되자 기후 조건이 최적인 하와이가 주목받으면서 본격적인 재배지로 확장되었죠. 1880년대 사탕수수 농장의  연합 조직인 소위 빅 파이브 회사는 모든 사탕수수 농장을 포섬하였고, 하와이의 경제적 주도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초기 노동력은 원주민이었으나 기대에 못 비치자 그 대안으로 중국과 일본에서 노동력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882년 중국인 배척법이 통과되자 중국인을 더 이상 고용할 수 없게 되었죠. 일본 이민자 역시 빠르게 증가하면서 노동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자 농장주들이 일본인의 이주를 억제하기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농장주들은 조선인 노동자를 선택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미국 공사이자 선교사인 알렌. 

그는 1884년 조선에 도착한 이후 고종 황제의 주치의로 발탁되어 황실의 신망을 얻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의 정치 문제에 깊이 관여하여 양국 정부 간의 핵심적인 중재자로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한편 1897년에 알렌이 미국 공사로 임명된 것은 당시 오하이오 주지사이자 친구였던 내쉬의 강력한 추천때문.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 사업권을 따낸 데쉴러는 내쉬의 양아들이었습니다. 알렌의 추천을 받은 데쉴러는 고종 황제로부터 사업의 책임자로 임명되었습니다. 

 

 

2층에는 넓게 그 시대의 설명과 사진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외무부 유민원 

 

 

당시의 여권인 집조. 

안창호 선생님의 여권도 보입니다. 

 

 

내리교회는 출발할때 전체인원의 반인 50명이 출발함으로써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가게 됩니다. 

 

 

고시. 

 

 

고시의 내용을 보면 굉장히 가고 싶게 만듭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정서는 조상의 묘를 관리해야 하고, 부모를 모셔야 하는 정서가 강해서 선뜻 나서는 이들이 적다고 해요. 

 

 

공고를 보면 참 가고 싶습니다. 

아마 저도 그 시대의 인천에 살았더라면 솔깃했었을 것입니다. 

 

 

 

 

존스목사는 내리교회의 3대목사님입니다. 

알렌 공사와도 친구였지요. 

교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이민을 권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06년에는 직접 하와이를 방문해서 교우들과 함께 했네요. 

 

 

갈릭호. 

첫 승선배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출발하지 않고, 일본에서 하와이까지 갔던 배인데 이 배를 타고 첫 이민자들이 갔던 것입니다. 

 

 

 

갈릭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동영상을 찍어보았습니다. 

 

 

배 안으로 들어가면 이민 경로를 알려주고 있지요. 

일본까지 목포를 거쳐서 갔고 나가사키항에서 신체검사를 받고는 102명이 승선했습니다. 

 

 

 

첫 사람들의 모습과 짐가방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쌀이 담긴 볏짚도 보이고 있네요. 

 

 

 

이민 1세대인 함해나 할머니에 대한 내용도 보여주고 있지요. 

대한부인구제회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에 힘쓰셨다고 합니다.

교회와 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해 평생 헌신하신분. 

마우이섬에 정착한 이래 오직 한 섬에서만 살았으며, 하와이에서 다방면으로 활동하면서 상당한 유품을 남겼습니다. 

 

 

 

 

이민자 명단을 직접 수기로 작성한 것. 

이것은 복제품이고요. 

하와이대학에 정품이 있습니다. 

 

 

 

도착해서 호놀룰루가 있는 오아후에만 정착한 것은 아닙니다. 

마우이, 빅아일랜드, 카우아이등 여러 곳으로 흩어질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복도가 나오고요. 

다음 전시장으로 가는 통로에는 사탕수수모형물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항해 64회를 알려주고 있고, 선박명과 도착날짜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원까지 알려주네요. 

 

 

 

재미 한인사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탕수수농장. 

1905년 약 65개의 농장에 5,000여명의 한인 노동자들이 혼합 농장에서 다른 민족들과 더불어 생활했습니다. 

감시를 받았고 뜨거운 햇빛 아래서 힘든 노동을 견뎌야 했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농장에서의 규칙적인 생활과 제도의 압막감이었죠. 

새벽 4시 30분 기상. 단 30분 점심식사였고 하루 10시간 고된 노동을 했습니다. 

 

 

 

집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고, 그 시대의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켠에 놓인 노동복과 가구. 

 

 

 

이런 모습을 보니 마치 한국같지만 이곳은 그래도 가족이 있는 하와이의 집 같네요. 

 

 

 

밖에는 항아리도 있는 풍경입니다. 

 

 

생활은 가족과 독신자를 위한 두 종류의 숙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결혼한 부부에게는 작은 정원이 있는 통나무집이 제공. 

독신 남자들은 긴 기숙사식 건물에 서너명씩 살았습니다. 

물가가 비싸고 음식이 생소하여 속소 근처에 채소를 심어 자신들이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었습니다. 

 

 

 

부인 전도회 사진. 

 

 

교회의 역할. 

아무래도 내리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갔기에 교회가 정보를 알 수 있는 연결통 역할도 하고,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그리스도연합교회인 이곳 교회. 

 

 

 

다양한 경제활동. 

세탁소, 빨래, 바느질을 했던 여성들. 

 

 

교육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도 교실맨앞에 앉아서 선생님과 함께 공부를 잠깐 해보았지요 ^^ 

 

 

카우아이 리후에 한인 학교 학생들. 

김종수 선생님. 

 

 

국어학교 교사와 학생들. 

 

 

콜로아 지방의 신흥소학교. 

 

 

독립군 양성 

박용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조선독립단을 조직하였고요. 

후에 이승만을 초대한 이도 박용만입니다. 

하지만 이승만이라는 사람은 한인을 두파로 나뉘고 본인이 직접 동지회를 만들죠. 

그는 꼭 조직은 와해시키고, 본인이 높임을 받아야 직성이 풀려야 했던 사람이었나 봅니다. 

 

국민회와 동지회는 분열이 엄청 심각해서 1970년대 까지도 두 조직이 서로 싸웠다는 카더라 통신. 

 

 

 

이제 1층으로 내려왔습니다. 

2층에서 참 많은 것을 느끼고 왔네요. 

그에 반해 1층은 여러 나라의 이민상을 각 부스에서 하나씩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대한인국민회 지도자들. 

안창호 선생이 지금 보니 엄청난 미남입니다. 

 

 

해외 입양. 

 

 

20여만명에 달하는 해외 입양은 1950년대 전쟁고아 및 혼혈아동문제로 시작되었습니다. 1953년 정전 이후 1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가 발생했지만 국가는 안보와 경제 발전을 취우선 과제로 강조하여 이 문제는 외국의 원조와 민간단체의 인도주의적 지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해외 입양은 이후 급속한 산업화에 따른 빈곤 가정의 아동과 미혼모의 아이들 입양으로 이어졌고, 점차 그 수가 늘어나 1980년대에는 해외 입양인 수 세계 1위 국가라는 불명예를 얻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88년 올림픽을 전후하여 한국의 해외 입양을 비난하는 목소리와 함께 해외 입양인의 수는 꾸준히 감소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정점에 이르렀던 1985년도 수치의 5% 내외 수준으로 감소하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해외입양 동포에게 공식적으로 사과까지 하셨고요. 

 

 

복도에는 해외 입양자의 명단이 적혀 있습니다. 

 

 

또 한 공간에는 하와이, 대한민국, 그리고 인천의 연관성을 설명합니다. 

 

 

 

인하대 건립도 많은 하와이분들의 성금으로 이루어졌죠. 

인하대는 인천하와이대학의 준말입니다. 

 

그렇게 가보고 싶었던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왔는데, 워낙 하와이를 좋아하는 만큼 다른곳보다 더 실감있게 관람하고 왔습니다 ^^ 

 

월미도근처에 가셨을때 꼭 가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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