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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안중근 의사 기념관. 중구 남산 소월로. 독립운동 민족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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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남산 소월로

안중근 의사 기념관

독립운동 민족의 영웅


 

 

 

남산에 자주 가는데 항상 바라만 보다가 이번에 제대로 관람하고 았네요. 


대한제국 말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조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힌 우리 민족의 영웅입니다. 2010년 새로 건립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안의사의 단지 동맹을 상징하는 12기둥 형태의 건물로 구성되었으며, 전시실에는 충생부터 순국에 이르기까지 전생애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숭고한 희생정신과 평화사상을 널리 선양하여 국민의 나라정신을 함양하고 인류평화를 이바지하는데 그 소임을 다하고 있죠. 

 

 

 

날씨도 좋은 날.

앞은 잔디밭. 우측으로 살짝 내려가면 됩니다. 

 

 

남산 타워도 훤히 보이고요. 

초록할때 오니 더욱 소중하네요. 

 

 

 

들어서면서 대한국인 안의사님에 대한 설명이 바로 표시되어 있고요. 

특이한점은 일본어로도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참배홀 

어린이들은 절을 하는 이들도 보았네요. 

 

 

 

 

 

상징공간 

 

 

 

격동의 시대, 

출생과 성장을 설명해 줍니다. 

 

 

 

 

 

활동도를 설명합니다. 

항일 독립운동의 명가로 15명이 독립운동의 공로로 서훈을 받았으며, 안의사는 최고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1897년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 수년간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천주교 전파활동도 펼쳤고요. 

을사늑약과 해외망명 계획을 합니다.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운영하는 등 조국과 민족을 되살리기 위해 활발한 교육활동을 펼쳤고요. 1907년 구채보상회 관서지부 설치 등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1907년 국외망명을 떠나 연해주의 한인사회 결속과 환난 구제를 위해 동의회를 조직,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의병으로 구국을 도모하고자 했던 안의사는 1908년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합니다. 이때 생포한 일본군 포로를 만국공법에 의해 석방하는 등 평화사상을 보여줍니다. 

1909년 초 11명의 동지들과 일심단결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단지동맹을 맺습니다.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미지는 2층 제3전시실에서 볼 수 있어요. 

 

 

 

재판장은 직접 만들어 놓은 조형물로 의미기 남다릅니다. 

하얼빈의거가 한국 독립전쟁의 한부분이며,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행한 것이므로 만국공법에 의해 처리해줄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일본 법정은 1910년 2월 14일에 사형을 언도합니다. 

 

 

 

 

 

5개월동안 뤼순감옥에서 자서전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합니다. 또 200여점으로 추정되는 옥중유필을 남겼는데,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57점이며 한국, 일본, 중국 등에 산재해 있습니다. 

1910년 3월 26일 31세의 나이에 순국합니다. 의거는 이후 한국 독립운동의 방향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었죠. 

 

 

 

가장 마지막에는 영상실도 준비되어 있고요.

이쪽에서 다시 밖으로 나갈 수 있네요. 

차분히 관람방향으로 다니면서 뜻을 기리고 공부할 수 있습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여섯 살에 서당에 들어가 8, 9년을 배웠다죠. 처음에는 아버지의 재기를 이어받아 학문적 성취가 만만치 않았으나, 점점 학업과 멀어져 끝내는 책상머리보다 집안을 드나드는 포수들과 어울려 산과 들을 내닫기를 더 좋아하게 되었답니다. 

말타기와 활쏘기, 포술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빼어난 솜씨를 보였고요. 학문을 게을리 하자 할아버지가 모셔온 독선생과 부모가 엄하게 꾸짖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의 글재주를 아까와하던 친구들이 "그대의 부친은 문장으로써 세상에 이름이 드러났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장차 무식한 하등인이 되려고 자처하는 거이냐?" 하고 간곡히 타일렀습니다. 

하지만 "자네들 말도 옳다. 하지만 옛날 초패왕 항우는 '글공부란 이름만 적을 줄 알면 그만이다.' 라고 했는데 초패왕의 명예가 오히려 천추에 남아 전한다. 나도 학문을 가지고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 초패왕 저가 장부라면 나도 장부가. 자네들은 다시 더 나를 설득하지 말라. " 하며 남아로서의 큰 포부를 드러내었다고요~ 

 

1909년 10월 26일 오전 이토히로부미를 처단 혹시 다른 사람이 이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일행 중 일본인으로 보이는 3명에게 다시 3발을 쏩니다. 이때가 9시 30분 

온 세계를 경악과 충격으로 몰아넣었죠. 

1910년 3월 26일 뤼순에서 사형집행 

 

정말 뜻깊은 곳입니다. 

특히 젊은 분들이 많이 갔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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